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단 편집) ==== [[테오도시우스 성벽]]: 재래식 성곽의 황제 ==== [[파일:iQgKMtv.jpg|width=879]] [* 출처: 위키피다아 영문판] ||[[파일:attachment/Theodosian_walls.jpg|width=100%]]||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으로 도시가 팽창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새로 성벽을 쌓았고, 이는 도시의 제1 방어선이 됐다.[* 그 뒤 86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은 지진으로 붕괴되어 흔적만 남게 된다.] 총 6㎞ 길이의 성곽은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각 구역마다 특징이 있었다. 성벽의 가장 안쪽에 내벽(inner wall, mega teichos, "great wall"), 그 바깥에 조금 낮은 외벽(outer wall, mikron teichos, "small wall")이 있었으며, 이 외벽과 해자 사이에는 parateichion라고 불리우는 흉벽(胸壁)[* 또는 흉장(胸牆). 나무위키 [[공성전]] 항목에는 방벽이라고 되어 있으나, 방벽은 방어용 벽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므로 흉벽이 더 적합하다.]이 자리했다. 각 벽 사이에는 페리볼로스라는 병력이 기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성벽 사이는 방어용 탑의 샛문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내벽의 높이는 무려 12m에 달했으며 두께는 4.5~6m 정도였다. 벽의 안쪽은 모르타르로 채워졌고 잦은 지진에 대한 보강도 이뤄졌다. 총 96개의 탑들이 20~70m마다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탑들은 높이가 15~20m, 폭이 10 m가량이었다. 막벽으로 외벽과 내벽이 50m 간격으로 엇갈려 있었다. 탑의 최상부 - 즉 옥상에는 전투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탑 내부는 2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탑의 아래층은 도시 쪽으로 열려 있었고 창고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위층에서는 바깥쪽으로 난 창문으로 적에게 사격도 가능했으나, 이후 보수 과정에서 창문과 총안이 사라져 최상부만이 유일한 전투 공간이 되었다. 두께 2m가량의 외벽은 내벽보다 조금 낮은 8~9m 높이었으며, 페리볼로스 쪽으로 아치형 출입구가 있어 도시 쪽에서 정문으로 들어가거나 안쪽 방어탑에 있는 샛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높이 12~14m, 폭 4m의 외벽 방어탑이 내벽의 탑과 탑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내벽은 [[최후의 저항]], 흉벽은 일차 저지라는 의미가 있던 만큼 본격적인 방어는 외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외벽은 가공할 만한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외벽은 활용 가능한 공간(페리볼로스)의 양도 적지 않았고, 성벽의 다른 부분과 크게 연계되어 있었던 만큼 성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해자는 외벽에서 20m 떨어진 곳에 20m의 폭으로 파여있었다. 10m 깊이의 해자 안쪽에는 총안이 갖추어진 1.5m 높이의 흉벽(parateichion)이 있어 일차 방어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막벽이 해자를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이 막벽 안쪽에는 수도관이 있어 해자에 물을 채우는 송수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자는 성 로마누스 성문 방면에서 급한 경사로 인해 유지 보수에 막대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 때문에 성 로마누스 방면부터 아드리아누폴리 성문 방면까지는 해자가 끊겨 있다. || [[파일:external/classconnection.s3.amazonaws.com/theo_walls1335987296121.jpg|width=100%]] || || 해자의 모습. 해자를 가로지르는 막벽이 보인다. ||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입지조건부터 방어에 최적화 되어있었는데,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 침입자들은 서쪽 방면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조건에, 기존의 공성법으로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크고 높은 성벽까지 쌓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재래식 성곽 요새의 극치'''를 자랑하게 되었다. 해안 쪽의 성벽은 평범한 단일 구조로 달랑 성벽 한 겹만 있었다. 그러나 이 한 겹의 성벽도 다른 성의 일반적인 성벽보다는 튼튼한 데다가, 해안 방면이므로 공략하기에 만만치 않은 난이도였다. 남쪽의 마르마라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평시에도 항해술을 제대로 익힌 승조원이 있는 튼튼한 선박만 근접이 가능하였고, 항구시설 또한 충분하지 않아 배를 접안하기도 어려운 곳이었으므로, 성벽을 건설할 때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 이쪽 방면에서 적군이 성벽을 넘은 사례는 전혀 없었다. 동쪽의 [[하기아 소피아]] 방면 성벽은 고대부터 [[비잔티움]]의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고도가 가장 높고 노출된 면이 적으며 역시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를 그것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라 평시에도 바다 쪽으로는 접근이 매우 어려운 곳이다. 실제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이곳이 최후에 함락되었을 정도로 방어수준이 높았다. 한편 북쪽의 금각만 방면 성벽은 해류의 영향도 없고 만의 폭도 좁아 건너편 육지에서의 지원사격도 가능한 확실한 성곽의 취약점이었다. 그래서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때는 베네치아인들이 이곳을 집중 타격하였고, 끝내 버틸 수가 없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황제가 반대파에게 살해되어 교체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그 덕에 방어력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빈약한 상태이긴 했다. 결정적으로 내통자 때문에 성문이 열렸다. 당연히 [[동로마 제국]]도 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국가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금각만에 해군을 배치해 두었다. 따라서 약점이라고 섣불리 공격했다간 성벽의 수비군과 바다의 해군에게 연합공격을 받게 되었므로, 사전에 동로마 해군부터 무력화하고 제해권을 쥔 다음에야 공격이 가능했다. 위와 같은 까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난공불락이었으며, 422년에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쌓은 뒤 도시가 정면으로 뜷려 함락 당하는 것은 무려 천 년 뒤인 1453년이다. 침입자들의 공격 방향은, 금각만의 [[동로마군|동로마 해군]]을 괴멸 상태로 만들고 이쪽 방면을 공략하지 않는 한 서쪽 방면으로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즉 공격 입장에서는, 공격을 가장 방어가 탄탄한 곳으로 할 수밖에 없는 불리함을 안고 공성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보통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 * 해자를 넘어 제1성벽인 흉벽을 기어 오르는 동안, 공격 측은 제1·2·3성벽으로부터의 합동공격을 고스란히 당한다. 또한 해자를 일부라도 메우지 않으면 공성병기가 성벽이나 성문에 접근하기 어려우므로, 난이도는 더욱 올라간다. *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고생한 뒤 제1성벽을 함락시켰다 싶을 때, 흉벽 공략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손실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흉벽 위와 제1·2성벽 사이로 들어 온 공격 측 병력은, 제2성벽인 외성벽으로 후퇴한 수비 측 병력의 외벽·내벽으로부터의 공격을 다시금 고스란히 당한다. 더 큰 문제는, 흉벽의 성문과 외벽의 성문이 엇갈려 있어 흉벽을 함락시키는 데 사용한 '''각종 중장비는 여기서부터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 공성병기는 방향전환이 어렵다. 당시엔 지금의 자동차 앞바퀴처럼 조향장치가 없으니 상대의 공격을 받으면서 한쪽만 밀어서 돌려야 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공격지점에 가서 한 번 더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특히 [[공성추]] 외에 쓸 수 있는 것은 나무사다리뿐.] 심지어 외벽은 흉벽보다 훨씬 높다. 흉벽을 넓게 넓게 헐어 버리면 외벽에 중장비를 댈 수 있다. 그렇지만 제2·3성벽으로부터 돌과 화살이 계속 쏟아지고, 공격측의 병력이 몰려 북새통인 와중에 그런 대공사를 진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피난 끝에 제2성벽을 함락했고, 수비군은 제3성벽인 내성벽으로 퇴각한다. 이제 똑같은 과정을 한 번만 더 되풀이하면 된다. 그리고 제3성벽은 제2성벽보다도 높다. 지휘관도 냉정을 잃게 되며, 부대 전체의 손실률과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악화되고, 병량을 비롯한 보급물자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시간이 흘러 싸우기 좋은 계절이 가고 [[겨울]]이 오면 추위 옵션까지 붙어 난이도는 또 다시 올라간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성문은 총 9개였지만, 왜인지 전해지는 이름은 더욱 많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벽이니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고, 개보수 과정에서 원래 있던 성벽을 폐쇄했을 수도 있다. 또한 본성문 이외에도 군사용 문이 따로 있었고, 수없이 많은 샛문들을 통해 성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게 하였다. 6㎞에 달하는 긴 성벽이니 당연히 필요한 조치다. 결국 악명높은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은 마지막까지 완벽한 정공법으론 함락되지 않았다. 수비대장이 부상을 입어 드러 누워 버리는 바람에 지휘체계가 마비되고, 몇 달 동안의 [[공성포]] 세례로 간신히 낸 성벽의 구멍을 통해 억지로 밀어 넣은 최정예병력([[예니체리]])이 맹활약을 펼치는 등, 여러 가지 호재와 피나는 노력, 그리고 행운까지 한꺼번에 겹쳐 시너지 효과를 낸 후에야 간신히 함락된 것이다. 그렇다고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이 공성측의 행운(수성 측의 불운)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다. 수비대가 성문을 닫지 못한 것은 수비대가 들어가는 것도 벅찰 정도로 공격측이 정신 없이 밀어붙였기 때문이고, 수비대장의 부상 역시 지속적인 파상공세로 인하여 수비대의 손실이 높아진 끝에 일어난 일이며, 성벽의 틈으로 최정예 병력을 밀어넣어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은 공성전의 기본 중 기본이다. 즉,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한 오스만 술탄국이 '운이 좋아질 때까지' 피나는 공을 들였고, 이미 쇠락한 동로마 제국은 운이 좋아질 때까지 두드리는 오스만 군을 저지하지 못할 정도로 피폐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Siege Assault[* 간단히 말해 병력 갈리면서 성벽에 헤딩하러 가는 것이다.]로는 절대로 뚫리지 않았지만, Siege의 가장 근본적인 공략법인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기'''[* 유로파 유니버살리스 4 에서 특히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시베리아 산지에 귀족 계층이 쥐고 있는 만랩 포트리스에 들이박고 5% 이상의 단위 로 뜨는 월당 소모율은 정말 묘사조차 불가능할 지경.]로는 함락당했으므로, 결국 완벽한 정공법으로 뚫리기는 한 것이다. 다만, 오스만 술탄국이 아나톨리아 영주들의 반란이라는 시간 제한까지 받게 하여, 공성에 실패하면 오스만이 역으로 끝장나는 단두대 매치를 성사시킨 것에서 테오도시우스 방벽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방어를 가능하게 한 [[콘스탄티노스 11세|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의 인품과 수비대장으로서 치트키 수준의 지휘를 보여준 제노바 출신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의 능력은 전설로 남게 되었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간혹 성벽을 깔끔하게 격파하지 못한 것을 문제삼기도 하는데, 애초에 [[오스만 제국군|오스만군]]의 목적은 [[콘스탄티노폴리스|도시]]를 점령하여 이용하는 것이지 도시를 초토화 시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성곽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득이다. 설령 파괴가 목적이었을지라도, 전술적으로는 먼저 돌파구를 찾아 저항을 무력화 시키고 점령한 뒤에나 여유롭게 부수는 것이지 공성 단계에서부터 성벽 전체에 대한 파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한 곳의 돌파구가 생기면 거기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건 공성전의 당연한 정석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